[국민생각]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광주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78년이었다. 그해 달력이 한두 장밖에 남지 않은 늦은 가을 어느 날, 해남 계곡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태어나 처음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대도시 광주의 중학생이 되었다.
광주 생활은 낯설었고, 열다섯 살 까까머리 어린 학생에게 적응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고모 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오가는 등하교는 초등학교 6년 동안 걸어서 오간 왕복 20리 길보다 더 멀고 외로웠다. 눈물 바람으로 헤어진 고향 동무들이 너무 보고 싶었고, 전학 가기 싫다고 떼 한번 써보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이런 막막한 광주 생활에서 흥분을 억누르지 못할 만큼 기쁨을 준 것은 영화관람이었다. 전학 온 학교 근처에 극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생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니…,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 선생님들이 인솔해서 극장을 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영화가 들어왔는데, 장터에 천막을 치고 상영하는 소위 천막 극장이었다. 영화는 외팔이 검객이나, 꼬마 검객 같은 칼싸움 영화가 많았다. 얼핏 꼬마 신랑이라는 영화도 기억난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10원 20원 하는 관람료를 흔쾌히 내어주는 부모가 드물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아예 학교에서 영화관람 자체를 금지해 영화를 보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그때도 용감한 아이들은 천막을 몰래 들치고 들어가거나 학생주임 선생님의 눈을 피해 기어코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극장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그저 놀랍고 또 놀라울 일이었다.

영화는 3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긴 시간이었지만, 스크린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재밌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열다섯 생애의 정수리에 천둥 번개 같은 타격을 가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연 전차 경주 장면이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경기장 아홉 바퀴를 도는 게임이었다. 그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보는 내내 화면을 찢고 들어가 악당 메살라를 뒤지게 패버리고 싶었고, 심장이 멎을 정도로 절박하게 주인공 벤허를 응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면 어린 시절 처음 본 영화 벤허의 기억은 이게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 나는 벤허를 몇 번 더 보았다. 서른 즈음에 TV에서 한 번 보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다시 보기는 우연히 얻은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스펙터클 한 기억과 달리 불혹이 지나고 지천명이 되어 보는 벤허는 또 다른 점에서 눈과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그중 하나가 경주 이전의 장면이었다. 벤허가 마지막 승부를 앞두고 자신의 네 마리 말과 나누는 소통이었다. 벤허의 말은 모두 하얀색 멋진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었다. 벤허는 그 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쓰다듬어주면서 전차 경주의 전략을 말해주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빠른 말은 외곽에, 빠르진 않아도 조화를 잘 이루는 말은 안쪽에, 그리고 지구력이 빼어난 말은 중간에 배치했다. 경주 때는 다른 일곱 명의 기수가 채찍을 들었지만, 벤허는 채찍 대신 말고삐를 쥐었다.
벤허는 말들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았고, 말들의 마음을 읽을 줄도 알았다. 말하자면, 말과의 소통, 교감의 방식이 달랐다. 이게 벤허의 리더십이자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살아가면서 혹시 비록 작은 무리라 할지라도 내가 앞장서야 할 경우가 생기면 벤허처럼 하리라 마음 다잡곤 하였지만,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또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그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다만, 이런 마음가짐을 간직하려 늘 애썼던 점을 위안 삼아 비록 나는 작은 사람이라 벤허의 리더십을 적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라지만,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이들을 만나면 꼭 벤허의 리더십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던 참에 마침 지방선거가 막 끝나 떡 본 김에 제사 지낼 기회를 얻었다.

이번 지방선거는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국민이 사정없이 회초리를 때렸다. 그러면서도 호남과 경기를 남기는 인정을 베풀어 반성하고 혁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그 백척간두의 앞자리에 강기정을 세웠다.
강 당선인은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고 3선 국회의원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우리 지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쓰여질 소중한 자산이지만, 시민들은 당장 그의 앞에 많은 숙제를 내밀었다. 광주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명 시장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남겨진 불씨로 민주당을 되살리는 밑불이 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 당선인이 국민에게서 답을 찾고 시민만을 바라보는 걸음걸이를 이미 시작했지만,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나는 그가 기왕에 가지고 있는 결기와 추진력에 벤허의 리더십을 더하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무등산의 어진 치맛자락 같은 광주의 리더십, 강기정의 리더십으로 시민들이 내민 숙제를 똑 부러지게 해내길 또한 간절히 소망한다.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