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완의 '커피한잔'> 한국사가 없다

<조경완의 '커피한잔'> 한국사가 없다
  • 입력 : 2022. 08.01(월) 07:00
  • /글=조경완
[국민생각]
매미소리 우렁찬 8월 아침, 오늘은 대통령이고 여야 권력싸움이고를 잠시 접어두고 우리역사 이야기를 좀 해보자. 지식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교양인이라면 역사에 관심을 안가질 수 없다. 우리역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면 무슨 책을 찾겠는가. 나라면 당연히 국사편찬위원회(줄여서 ‘국편’이라 부른다)가 발간한 한국사 책을 기꺼이 구입하여 통독하겠다. 그런데 그게 무려 53권짜리다. 연구자가 아니라면 덜컥 일독에 착수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좀 두껍더라도 최고 권위기관인 국편이 한국사를 정리한 한권짜리 통사(通史)는 없는 것이다.

물론 기존엔 1970년 서울대 한우근교수가 쓴 620쪽짜리 한국통사가 있다. 동경제국대 서양사학과 유학생이던 한교수는 해방후 서울대 사학과에 편입하여 한국사 연구자가 되었는데, 기존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이책을 썼다고 밝힌다. 일본인의 시각인 ‘을사보호조약’이란 용어를 이 책에서 ‘외교권피탈’로 쓴것도 그런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서술은 단 32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서운하다.

이후로도 2014년에 이화여대 신형식교수가 쓴 670쪽 짜리 ‘신 한국통사’가 나왔고 재야사학자 이덕일씨가 쓴 세권 짜리 ‘한국통사’ 가 있으며 청소년을 독자로 하는 열댓권의 한국사 책이 있으나 일반국민이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고 읽어볼 권위있는 한국사 책은 없는 것이다.

나는 국가로부터 최고권위를 부여받은 국편이 국민대중이 손쉽게 즐겨 읽을 한국사 책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고대사분야 연구가 허접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해방후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가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에 격동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역사학계는 어렵고 고달프고 불확실하고 돈 안되는 연구는 전혀 하지 않았다. 사료가 풍부한 조선사와 근현대사에 기형적으로 연구가 몰려있을 뿐 십수년간 쟁점이 되어온 고대사 분야에 대해서는 일제 사학자들 연구결과에서 탈출 할만한 연구업적이 없었다. 그러고도 아무탈 없는 분야는 학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구석을 뒤져도 없을 것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인내심을 갖고 국편의 쉰세권짜리 한국사의 첫권을 보자. <고조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과 쟁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중심지 문제였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특히 평양이었다는 평양중심설과 요동지역의 요하 또는 대릉하(大凌河)였다는 요동중심설로 나뉘어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고조선의 강역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이 언제 세워졌느냐에 대한 답도 없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기원전 24세기에 건국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국편은 망설인다. <고조선의 명칭은 선진(先秦)시기 문헌에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언급되고 있으며,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경 연(燕)나라와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 국가적 수준의 정치체로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로 적고 있다. 오래된 것 같긴 하지만 기원전 7세기나 4세기에야 기록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 건 비과학적이라고 여기며 1천700년을 훅 날려버린다.

뜨거운 쟁점인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예 뭉개고 넘어간다. <한사군은 사료상으로 약 26년 정도 존재하였을 뿐이고 대부분이 곧 폐지되거나 중국내륙으로 이동하였으며, 단지 낙랑군만이 존속되어 중국과의 연결 창구와 중국문화 유입의 통로 구실을 하였다…> 낙랑군이 중국하북성에, 나머지 3개 군이 요동반도와 만주에 있었다는 다수의 중국사료는 거론하지 않는다. 갈등을 느꼈는지 매우 짧게 기술하고 지나가버린다.

삼한(三韓)의 정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삼한사회는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성립되어 있던 토착사회가 성장 발전한 것이다. 삼한의 명칭 및 형성과 관련하여 요동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북삼한(北三韓)이 남하하여 남삼한(南三韓)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재야학계의 거센 주장에 못이겨 이설도 소개 해준다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대륙백제문제, 고려의 국경선 문제, 서희가 외교로 확보했다는 강동6주의 위치문제 등등 수많은 쟁점들에 대해서 국편은 결론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한 국가가 자국의 역사를 쓴다고 할 때 그 주춧돌과 기둥에 해당하는 고대사와 중세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꼴이니 국편은 방대한 분량의 한국사를 만들어 놓고도 국민대중의 손에 쥐어줄 한권의 통사를 못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선지 기이하게도 국편은 고교 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 업무를 하지 않고 있다. 현행 교과서들은 모두 예닐곱명의 사학과 교수들이 저자이고 검정은 교육부가 하고 있다.

국편은 기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한 내력을 가졌다. 일제는 1910년 11월 총독부 관보 69호로 51종의 금서를 지정하여 20만권의 서적을 소각하고 귀중본은 일본으로 빼돌렸다. 1915년부터 조선사 편찬작업을 시작했고 1925년 일왕 칙령으로 총독부 직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이완용후작이 고문으로 돼있다. 조선사편수회는 16년에 걸쳐 조선사 35권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통탄할 식민사관의 바이블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해방후 1946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으로 일했던 신석호씨는 군정청에 조선사편수회의 수많은 사료와 기록들을 보존할 것을 요청하여 경복궁 뒤뜰에 ‘국사관’을 설치했는데 이게 1949년 국사편찬위원회로 개칭된다.

근대학문의 방법론이 부재했던 해방공간에 일제가 만들어 놓은 치밀한 ‘조선사’를 모조리 불살라버릴 수는 없었다 치자. 그러나 광복 77년이 되는 동안 국편과 한국사학자들은 말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자고 하면서도 실제론 식민사관을 대신할 제대로 된 역사연구를 하지 않았다. 국편은 이제 재야사학계를 사이비로만 몰지 말고 일년에 서너차례씩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한국사의 쟁점들에 대해 정면승부 해야한다.
/글=조경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