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각]
지난 25일 ‘2022 김대중 민주평화 학술회의’가 전남도 주최로 전남도청 왕인실에서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이하 DJ) 서거 13주기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학술회의의 주제는 ‘김대중 그리고 세계 지도자의 평화 사상’. 김성재 김대중 평화센터 상임이사(전 문화관광부장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 외교원장), 이재봉 원광대 명예교수, 최영태 전남대 명예교수 등 국내의 유명 석학들이 주제 발표자로 참여해 DJ를 추모하고 그의 사상을 회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필자도 토론자로 참석해 주제 발표 내용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성재 전 장관은 기조강연을 통해 DJ 정신이 ‘민주주의‧인권‧평화’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DJ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정책기획수석,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해 DJ의 복심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는 “DJ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다수결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보장하는 참여민주주의…포용적 민주주의, 사회통합 민주주의”라고 역설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DJ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이밖에도 정의, 화해, 통합 등 무수하게 많다. 하지만 DJ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역시 ‘민주‧인권‧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전 장관의 기조강연을 들으면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후보가 DJ 정신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이 불현듯 떠올랐다. 김 전 장관이 말하는 것과 우리나라 국가 원수인 윤석열 대통령이 생각하는 DJ 정신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 2월 23일 하의도 DJ 생가를 방문해 “김대중 정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국민통합 정신이다.”라는 방명록을 남겼다. 후보 시절 다른 자리에서도 “김대중 정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라고 하면서 DJ를 존경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본인 생각인지 누가 써준 것인지, 그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DJ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것이 맞는 말일까. 물론 김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DJ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DJ 정신이라고 한 것은 잘못을 넘어 왜곡이다. DJ의 어록이나 자서전에 ‘민주주의’라는 말은 넘쳐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없다.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초에 서구에서 등장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최소 강령에 해당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형식적‧절차적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형식적 평등에 치우쳐 경제적 약자의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실질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19세기 중엽에 등장한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등 유럽의 복지 국가들이 사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의당이 사민주의를 추구한다. DJ의 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사민주의에 더 가깝다. 이에 반해 자유민주주의는 부자들이나 엘리트주의자들 혹은 거대 재벌들이 선호한다.

자유는 보수정권이 전유물처럼 쓰는 말이다. 윤 대통령은 자유라는 말을 유독 좋아해 대통령 취임사에서 35차례,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33차례나 언급을 했다. 보수정당의 당명에도 자유라는 말이 자주 사용됐다. 이승만은 자유당, 김종필은 자유민주연합, 3당 합당을 단행한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민주자유당, 이회창은 자유선진당, 박근혜는 자유한국당을 만들었다.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 이름에도 자유가 들어간다. 그들이 사용하는 자유는 성경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나, 미국의 독립운동가 패트릭 헨리가 말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때의 자유와는 개념이 다르다. 김남주 시인은 옥중에서 쓴 ‘자유’라는 시에서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라고 일갈했다. 그들이 자유를 앞에 내세웠지만 과연 이에 걸맞은 행동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9년 7월 25일 취임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취임사에 이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말이 등장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법 집 행기관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두 축으로 하는 우리 헌법 체제의 수호를, 적대 세력에 대한 방어라는 관점에서만 주로 보아왔습니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의 본질을 지키는 데 법 집행 역량을 더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쯤되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DJ 정신이 아니라 윤석열 정신, 검찰 정신이 아닌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같은 말을 했다. 이명박은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65년 전 우리는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우리 민족은 인류사의 보편적 길로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두 바퀴로 삼아 ‘발전의 신화’를 창조할 토대를 닦았습니다.”라고 했다. 마치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인 것처럼 말한다. 박근혜도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시절인 2007년 2월 8일 “만약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나라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이 보수라면 저는 자랑스럽게 보수를 택할 것이고, 그런 게 진보라면, 자랑스럽게 진보를 선택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 어디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없다. 헌법 전문에 보면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는 표현이 나오고, 제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가 헌법 정신이라고 한 것은 자의적으로 법 해석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은 1948년 6월 23일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을 국회에 상정한다. 당시 기초위원을 대표해 유진오 박사는 제안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폐단을 치유하기 위해, 정치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 이념을 헌법의 기본 정신으로 삼으려고 했다.”

우리나라 현행 헌법은 물론 제헌헌법에도 없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널리 확산하고 보수정부에 주입한 세력은 뉴라이트다. 뉴라이트 이론가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국제의 기본으로 하여 출발하였습니다.”(<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223쪽)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부에서 완성된 역사 교과서 개정 파동은 뉴라이트가 주도하고 교육부가 승인했다. 그들은 역사 교과서에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중‧고교 2020년 역사 교과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이전처럼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되돌렸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에 등장했던 ‘대한민국 수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꿨다. 뉴라이트의 입김을 뺀 것이다. 하지만 보수 정권이 다시 들어섰으니 역사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가 또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DJ 정신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한데 이어, 올해 5‧18 기념식에 참석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피로써 지켜낸 5월의 정신’이라는 말을 했다. 지하에서 DJ와 5월 영령이 통탄할 말이다. 일반인과 달리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영향력이 크고 국격으로 연결되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사실 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말, DJ와 5월 영령을 모독하는 말은 앞으로 삼가야 할 것이다. DJ를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그의 사상과 정신을 제대로 알고 해야 한다.

필자는 학술회의 종합토론 시간에 김성재 전 장관에게 윤 대통령의 이 말과 관련한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가 오전에 기조강연을 하고 서울로 바로 올라가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고 답변을 듣고 싶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회초리를 들어 그것을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국민인 우리들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