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각]
지난주 금요일(7일) 광주 KIA 챔스언스필드로 야구를 보러 갔다. 올들어 두 번째 직관이다. 오랜 야구 팬이지만 나이가 든 탓인지 직관을 하는 것보다 집에서 TV로 보는 것이 편하다. 이날은 나지완 선수의 은퇴식이 있는데다 KIA 타이거즈의 포스트 시즌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날이라며 딸이 예약을 하고 조르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라 갔다. 야구장엘 가면 야구 보는 것 못지않게 맥주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어쩌면 나도 딸이 예약을 하고 불러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딸 아이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아빠인 나의 영향이 크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당시 1970년대에는 고교 야구의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에서 지역 팀인 광주일고나 광주상고, 진흥고의 경기가 열리면 라디오를 갖고 온 친구와 함께 수업 시간에 몰래 들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프로야구가 창설된 1982년은 개인적으로도 암울한 시기였다. 건강 악화로 군 면제를 받고 시골 집에서 장기 요양 중이었다. 오후에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대학노트에 기록지를 만들어 해태 타이거즈의 거의 모든 경기를 기록했다. 아래쪽에는 그날의 관전평과 함께 수훈 선수의 사진을 붙였다. 이를 위해 해태 부라보콘에 들어있는 선수들의 사진을 부지런히 모았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이도류’로 각광을 받은 오타니처럼 첫 해에 투수로 10승, 타자로도 3할 타율에 타점왕이 된 김성한 선수의 팬이 됐다. 그의 등번호가 11번이다. 그해 11월 11일에는 ‘구원의 별에게’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편지를 노트에 적었다. 부치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그 노트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88년 신문사에 입사해 기자가 된 후에는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야구와 멀어졌다. 2000년대 초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 당시에는 무등야구장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용봉동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커서도 자연스럽게 야구 팬이 됐다. 큰애인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닐 때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면서 잠실야구장을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같이 광주에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챔피언스필드라고 해서 웃었다.(그 여자친구는 아들이 군에 있을 때 고무신을 바꿔 신었다. 아들은 의외로 쿨했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딸 아이도 요새 공부는 안하고 야구 중계에 빠져 있다. 모두 애비 탓이라고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한다. 사적인 얘기가 길어졌다.

챔피언스필드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림 같은 메이저리그 구장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대로 모양과 격식을 갖춘 새 구장에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챔피언스필드가 들어서기 전의 무등야구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60년대에 지어진 무등야구장은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보수를 했지만, 1만 명이 약간 넘는 관중밖에 수용하지 못했다. 관람석의 의자가 작고 앞뒤 간격도 비좁아 사람이 지나다니기 어려웠다. 계단도 가팔라서 사고 위험이 컸다. 구장은 내야가 맨땅인데다 배수가 되지 않아 비가 오면 질척거려 다음날도 경기를 못했다. 나는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근무할 때 야구 팬으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 새 구장 신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프로야구 구단은 미국에 30개, 일본에 12개, 한국에 8개 등 한‧미‧일에 모두 50개가 있다. 그 가운데 무등야구장의 수준은 50번째로 최하위다. 모든 경기가 TV로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는데 열악한 무등야구장이 나올 때마다 시민들의 자존심은 무너진다. 광주라는 도시의 이미지도 훼손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 강운태 시장 시절인 2014년에 마침내 챔피언스필드가 개장했다. 새 구장 신축에 내가 쓴 글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새 구장 신축을 앞당기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자부심을 늘 갖고 있다. 이번에 갈 때도 감회가 새로웠다.

이날 챔피언스필드에서는 나지완 선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나지완은 2008년 입단 후 15년을 KIA 타이거즈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다. 통산 15시즌 동안 1472경기에 출전, 1265안타 221홈런 862타점 668득점 (OPS 0.857)을 기록했다. 나지완이 기록한 221홈런은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최다 홈런 기록(2위는 김성한 207개)이다. 지난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온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은 타이거즈의 역사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우리 뇌리에 살아 있다. 당시에 TV를 보다가 아이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온 아파트 단지에서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홈런은 나지완에게 한국시리즈 MVP를 안겼고, 타이거즈는 대망의 10번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나지완은 우리에게 거포로 인식되지만, 30홈런을 넘긴 시즌이 없고 20홈런을 넘긴 것도 5시즌밖에 안 된다. 2017년 27홈런이 최다 홈런 기록이다. 그러나 15시즌을 ‘원클럽 맨’으로 뛰면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그는 타이거즈의 영웅이다. 제2의 인생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야구 선수 중에서도 말 재주가 뛰어난 나지완은 TV 중계 해설위원이 제격이다. 내년에 TV에서 해설위원으로 팬들과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이날 경기에서 타이거즈는 KT 위즈를 11-1로 꺾고 자력으로 5위를 차지했다. 4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이다. 지난해에는 타이거즈가 사상 처음으로 꼴찌나 다름없는 9위를 차지해 팬들의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다. 그런 점에서 올해 5위는 진일보한 것이다. 하지만 한때 3위까지 치고 올라가 승승장구하던 팀이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급전직하해 턱걸이로 5위를 지킨 것은 아쉽기 짝이 없다. 특히 정규 리그 최종 성적 70승1무73패(승률 0.490)로 팬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5할 승률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오는 12일부터 시작되는 포스트 시즌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패한다면 팬들의 실망감이 더 클 것이다. 5위는 4위에 2전 전승을 거둬야 올라갈 수 있는 구조여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올해 처음 타이거즈의 지휘봉을 잡은 김종국 감독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가 시즌 시작 전에 인터뷰에서 밝힌 목표는 4위다. 4위 달성은 못했으나 근접했다. 올 시즌은 이미 지나갔고, 중요한 것은 내년 성적이다. 김 감독이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고 장수 감독이 되려면 선배인 선동열 전 감독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선 전 감독은 2012~2014시즌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하면서 5위, 8위, 8위의 성적에 그쳤다. 당시는 9개 팀이어서 사실상 꼴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선 감독과 재계약했으나 극성스럽기로 유명한 타이거즈 팬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첫 해에 5위를 차지한 선 감독은 사명감을 갖고 팀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서 프런트에 건의해 보강하는 등 대책을 세워 다음 시즌에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창가였던 ‘청량리 588’이 연상되는 5‧8‧8위를 차지해 팬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은 여전히 타이거즈 팬들의 영웅이지만, 그가 타이거즈 감독을 맡아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올해 5위를 차지한 김 감독은 팀의 약점을 보강해 내년 시즌에는 더 도약해야 한다. 올해 타이거즈가 5위에 머문 것은 외국인 투수들의 부진이 컸다. 외국인 투수 성적은 놀린 8승, 도중에 퇴출한 로니 3승, 새로 뽑은 파노니 3승 등 모두 14승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2위를 차지한 LG 트윈스는 외국인 투수 2명이 31승을 거뒀다. 31승과 14승의 차이가 2위와 5위의 성적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선수 3명의 농사는 한해 전력의 절반을 차지한다. 마무리 투수인 정해영의 기록도 신통찮다. 32세이브를 거뒀지만 3승7패에 평균자책점이 3.38이다. 블론 세이브가 10여 차례에 달했다. 마무리의 평균자책점이 3.38이면 낙제 수준이다.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팬들은 김 감독이 스토브리그 와 전지훈련 기간에 팀을 어떻게 리빌딩하는가를 면밀하게 지켜볼 것이다. 미국에서 야구 감독은 해군 제독,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더불어 남자들이 꼭 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직업이다. 스포츠 감독은 성적으로 말한다. 김 감독의 성공과 재계약 여부는 내년과 내후년 성적에 달려 있다.

타이거즈는 광주 연고의 단순한 스포츠 팀이 아니다. 타이거즈는 지난 40년 간 광주 시민과 애환을 함께해 왔다. 저 암울한 1980년대에 광주 시민들은 승승장구하는 타이거즈를 보면서 울분을 달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일본이 전후에 잿더미를 딛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프로야구와 연관을 지어 흥미롭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 사람들이, 뒤지다가 9회 말 투아웃 후에 역전승을 하는 야구를 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동력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야구는 국기라고 할 만큼 여전히 인기가 높다. 광주에서도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야구장을 찾아 여가를 즐기고, 야구를 보면서 삶의 희망도 함께 키워 나갔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