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각]
미술담당기자를 20여년 했던 내겐 참으로 행복한 기억이 많다. 되돌아보면 우연한 기회에 미술분야를 맡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인생의 방향키를 바꿔 버렸다. 문학청년 시절을 보내고 신문사 문화부기자가 되었을 때 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시인을 꿈꾸며 쫓아 다녔던 A시인이 당시 문화부장이었는데 문학과 미술을 담당하던 B선배기자가 출산휴가에 들어가자 내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불과 몇 달간이었지만 기자로서 접하는 미술은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예술분야였다.

먼저 미술은 그림이나 조각, 공예품 따위를 다루는 분야로만 알았던 박약한 나의 예술지식을 부끄럽게 했다. 또한 미술품은 역사가 아닌 것이 없고 동시대인의 감정과 삶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에 눈 떴을 때 나는 멱살을 잡힌 듯 끌려들었다. 미술의 새로운 가치를 알아가면서 문학 못지않게 깊고 넓고 멀고 높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 더, 화가 등 미술 쪽 예술가들의 예술열정은 더욱 존경심과 감동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미술의 바다에 푹 빠져버렸다. 이렇게 미술기자의 길은 시작되었다.

1998년 7월 나는 미술기자로서 취재를 위해 일본 동경으로 출장을 갔다. 일본에 유학하여 한국에 근대미술을 도입한 화가들을 발굴할 목적이었다. 특히 동경미술학교(현 동경미술대학) 출신의 호남출신 화가들의 대학시절 수학 및 활동자료를 찾아 한국에 처음 공개하는 기사를 써서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잡고자 했다. 정부가 지정한 ‘1995년 미술의 해’ 이후 한국의 근대미술사료와 작가 발굴사업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특히 호남지역 근현대미술에 대한 발자취를 더듬어 정리하는 작업들이 한창이었다.

지역 미술계와 언론에선 호남 현대화단의 거목으로 불리던 오지호화백 이전의 근대미술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이 큰 화두였고 과제였다. 일제 강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남종화의 본산인 호남화단에 서양미술이 도입되었는데 그 시초와 시발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과 주장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광주의 한 신문사가 발간하는 월간지에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 김홍식’에 관한 기사를 실어 지역 미술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여수출신인 김홍식화백이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남지역에 처음으로 들여왔다는 취지를 담았다. 주로 여수지역의 미술인과 지역민들의 구술증언, 후손들의 설명을 토대로 유작 몇 점을 소개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당시에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김홍식화백의 모교인 동경미술학교를 직접 방문해 그의 학적부 등 기록과 자료를 수집해 정확한 근거에 입각한 사실 보도를 하려고 현지취재에 임했었다. 추가로 당시 일본의 서양화파 활동, 동기생 및 동창회 전시, 일본유학 조선인 학생들의 수업과정, 식민지 유학생 관리방침 및 교육과정 등을 취재할 수 있었다.

일본말도 서툰 내가 동경 한복판에서 수 십 년 전의 미술사료를 찾고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고마운 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분의 헌신적이고 책임감 있는 지원태도와 사후확인까지 철저하였던 ‘완벽한 직업정신’에 감동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동경미술대학 미술관의 담당자 요쓰가마씨이다. 그는 학적업무를 담당하였는데 휴가 중에도 출근하여 내가 요구한 김홍식 화백의 학적부를 절차에 따라 사본을 발부해주어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 김홍식화백’을 새롭게 발굴하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학적부에는 김화백의 출생지와 출신학교, 지도교수, 전 학년 성적, 입상경력, 성품, 특성, 동기생, 졸업작품전 출품작 및 내용 등 그가 화가로 수업 받은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꼼꼼히 담겨있었다.

이것뿐이 아니었다. 요쓰가마씨에게 ‘학예사’로서 존경심과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게 하도록 하는 일은 내가 귀국한 이후에 계속되었다. 그는 자국의 대학에 유학하여 한국의 근현대미술 선구자로 새롭게 기록될 화가의 보다 정확한 재조명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자료를 찾아 국제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동경 외곽으로 이전한 대학 미술관의 수장고 담당자에게 부탁하여 김화백의 졸업 작품 두 점과 당시 동기생들의 졸업 작품집은 물론 스승 후지시마 다케지교수의 화집,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회화에 영향을 끼친 신인상파 화가자료, 동경미술학교 동창회명단 사본 등을 입수해 보내준 것이다. 그의 직업 ‘학예연구사’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미술을 역사적, 학문적, 예술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평가하는 미술관의 핵심실무자는 이러한 정신으로 자기 일에 충실하여야한다는 직업관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엔 우리나라에 미술관도 많지 않았고 ‘학예연구사’도 박물관 등에 정규직으로 있었을 때 였지만 너무 멋지고 부러운 직업으로 각인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학예사나 큐레이터, 예술감독 등에 대해 종종 경외감을 갖거나 가지려 하는 경향이 있다. 영문학을 전공한 내가 나중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박사과정을 미학미술사 분야를 공부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컷다. 물론 석사 논문도 이때 발굴한 김홍식화백의 자료를 기반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이런 미술기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미술관의 전시와 행정, 시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학예연구사, 큐레이터들의 활동에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과의 친분도 두터워졌고 이들이 성장하여 학예연구실장이 되고 미술관장에 오르며 활약하는 모습을 응원해 오고 있다.

최근 광주시립미술관 차기 관장 공모를 실시했다가 ‘적격자 없음’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단 아쉬움이 앞섰다. 우선 공모에 참여했다가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하고 ‘부적격자’가 되어버린 지원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싶다. 간접적으로 들려온 응시자의 대부분이 광주의 중견 미술인들로 제 나름대로 경험과 관록을 쌓아온 전문가들인데 이렇게 광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심적 상처가 적지 않을 터이다. 미술관장 선임 ‘부적격’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과거에도 두어 차례 있었으니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술단체는 아무런 목소리도 없다.

미술관장을 어떻게 누구를 뽑던 광주시립미술관은 광주시민을 위해 광주미술이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본다. 평생 미술관 등 현장에 근무하여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연구기획하며 자기 길을 걸어온 광주 미술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분위기 조성이 아쉽다. 더불어 광주미술계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남 좋은 일했던 이전의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다. 광주시와 미술계가 함께 고민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