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각]
새해 들어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편 논의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선거 제도 개편에 불을 붙인 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조선일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선거제는 다양한 국민의 이해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하는데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라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을 좀 더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한테서 모처럼 들어보는 신선한 말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즉각 화답했다. 김 의장은 “현행 소선거구 제도에서 사표가 많이 발생해서 국민의 뜻이 제대로 선거 결과에 반영되지 못하고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로 인한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라며 “선거 제도에 따라서 지역 균형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국민의 표심이 선거에서 비례적으로 나타나고 가령 호남에서도 보수 정치인들이, 대구·경북에서도 진보 정치인들이 당선돼서 지역 표심을 반영할 수 있는 그런 정치제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늦어도 2월 중순까지는 선거법 개정안을 복수로 제안하고 그것을 본회의를 통해 300명 국회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라며 “오는 3월 중순까지는 내년에 시행할 총선 제도를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1988년 4월 열린 제13대 총선부터 도입됐다. 유신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9~12대 총선에서는 중대선거구제가 시행됐다. 중대선거구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당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위해 도입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판의 대상이 되고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소선거구제가 부활했다. 소선거구제는 선거구에서 1인을 뽑고, 중대선거구제는 2~4인을 뽑는 제도다. 중대선거구제는 소수정당 후보의 원내 진입이 유리하고 사표가 줄어든다. 선거구가 넓다 보니 후보자가 난립해 오히려 중진 정치인에게 유리하고, 선거비용이 많은 드는 것이 단점이다. 복수 공천에 따른 계파정치가 심화했다는 비판도 따랐다.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소선거구제도 30년 넘게 시행하다 보니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 거대 양당 후보가 아니면 당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승자독식으로 유권자의 표심이 국회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대표성 문제가 제기됐다. 지역감정과 진영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2020년 21대 총선에 참여한 2874만여 명의 유권자 10명 중 4명(43.7%·1256만7432표)이 던진 표는 ‘사표’가 됐다. 국민의힘은 영남지역에서 55.9%를 득표하고도 영남 65석 가운데 56석(86.2%)을 차지했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에서 68.5% 득표율로 호남 28석 가운데 27석(96.4%)을 쓸어 담았다.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는 뚜렷한 장단점을 갖고 있다. 어느 것이 좋은 제도라거나 모범답안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 국가들은 대부분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대선거구제가 한국의 망국적인 지역 구도를 완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영호남 갈등의 뿌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현대에 와서 정치제도와 정치인들이 심화시킨 측면이 있다. 박정희-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선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은 내놓고 지역감정을 선동했다. 그 이후, 특히 소선거구제가 시행되면서 총선에서 영남은 보수정당, 호남은 진보정당 일색으로 국회의원이 선출되다 보니 지역감정은 더욱 굳어져 가고 있다.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된다면 영남에서는 진보정당, 호남에서도 보수정당 후보가 나와 지역 구도를 완화하고 민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 정치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망국적인 지역 구도를 타파하고 나아가 통일에 주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한다면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와 농촌의 선거구를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는 도농복합선거구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농촌의 경우 현재 4~5개 군이 한 선거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대략 10개 군을 한 선거구로 묶어야 한다. 지역 정서가 다른 농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폐해가 많이 발생한다. 따라서 농촌은 현행대로 소선거구제를 유지하고, 수도권과 인구 100만 명이 넘는 특례시, 광역시는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된다. 예를 들어 광주의 경우 동‧남‧서구와 북‧광산구 등 2개 선거구로 나눠 각 4명씩 선출하면 된다. 사실상 지역 개념이 없는 대도시에서는 중대선거구제가 무방하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오는 3월 중순까지는 내년에 시행할 총선 제도를 확정할 계획이라고 했지만, 국회가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거구제 개편은 여야 합의가 필수적이다. 현재로서는 민주당이 중대선거구제 채택에 부정적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중대선거구제를 제안한 윤석열 대통령의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전체 지역구 의석의 절반에 달하는 수도권 121석 중 민주당 103석, 미래통합당(국민의힘) 17석, 정의당이 1석을 각각 차지했다.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수도권에서 대등한 의석을 가져가고 영남을 포함해 다수당이 되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의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내년 수도권 총선에서 당시와 같은 거대의석을 확보한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은 서울 민심이 변했다. 민주당이 하루빨리 미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 당장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지 않더라도 정치권에서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22대 총선이 어렵다면 23대 총선에서라도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눈앞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미래 세대를 위해 동서로 갈린 망국적인 지역 구도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