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각]
시절이 어수선할수록 다시 보아지는 것은 우리 역사다. 온고지신의 당연한 이치다. 초등학교시절 우리 역사를 처음 배우면서부터 애통한 대목들이 있다. 나만 그럴까. 바로 삼국통일을 한 나라가 왜 하필 신라였냐는 것이다. 역사엔 가정법이 무용하다는 건 안다. 그러나 생각 할수록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은 전혀 자랑스럽지가 않았다.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하고 나당 연합군이 부여성을 함락하자 삼천궁녀가 백마강에 투신을 했다는 대목을 가르치던 어릴적 선생님의 수업은 비탄조였다. 수나라와 당나라를 혼내주던 고구려마저 멸망하고 국토가 쪼그라든 채 이루었다는 신라의 통일은 그래서 어린 소견에도 치사하게 느껴졌다.

백제는 국력의 한계가 있었다 치고,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한민족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내몽골과 시베리아까지를 망라하는 대제국이 되지는 않았을까. 화하족의 중원과 한민족의 동북이 동아시아를 양점하여 경쟁하고 교류하며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내지는 않았을까. 한반도에 갇혀 그나마도 일본에 먹혔다가 동서냉전으로 분단된 비극은 없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은 여럿 있다. 고려 우왕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을 장악 했더라면? 세종때 이종무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한 후 직접통치를 했더라면? 율곡의 십만양병 주장이 관철 됐더라면? 그중에도 또하나 애통한 대목은 바로 소현세자의 죽음이다. 듣자니 소현세자 독살설을 주제로 하는 사극영화가 인기라 한다. 학질로 죽었다고 하나 온몸이 검게 변하고 일곱구멍에서 피가 흘렀다는 기록이 실록에도 있는 만큼 그가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됐으리라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처참하고도 처참한 임진왜란 7년전쟁을 겪은 나라가 30년만에 만주족에게 또다시 나라를 짓밟힌 비극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인질로 끌려가 7년간 청(淸)의 수도 심양에 머물며 인품과 지략으로 사실상 조선의 특급 외교관 역할을 하다 돌아온 소현세자는 불과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만다. 청과의 관계는 냉랭해졌고 노론세력이 주도하는 조선은 사대의 대상 명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썩은 주자학 만을 더욱 붙든다.

수년전 나는 창비에서 출간한 심양장계(瀋陽狀啓)라는 벽돌책을 인내하며 읽은 적이 있다. 바로 홍타이지에게 볼모로 끌려가는 순간부터 심양에 도착한 뒤의 모든 상황을 인조에게 보고한 소현세자의 편지를 번역한 책이다. 명말청초의 리얼한 사회상과 청 수뇌부의 정책결정과정, 군사기만술, 스파이 운용, 조선의 조공무역, 인질로 끌려온 조선인의 속환과정등이 상세히 적혀있다.

홍타이지의 신임을 얻은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더 이상 미약한 인질이 아니라 때에 따라 청나라 장군들을 꾸짖기도 하는 기품있는 예비군주였다. 소현세자는 주자학이 나라를 망친 것을 통감했고 청에 와있던 유럽 선교사들로부터 근대과학과 의학을 접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를 조선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그런 그가 인질석방으로 한양에 돌아온지 두달만에 죽는다. 이때가 1645년이다.

광해군의 만년 실정에 들고 일어난 인조반정, 인조 자신은 군주가 시원찮으면 언제든 갈아치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끝까지 명에 사대하다 호란을 겪은 노론들은 청의 두터운 후원을 업고 돌아온 국제스타 소현세자의 개혁 드라이브가 두려웠을 것이다. 역사엔 진정 가정법이 무용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인조의 뒤를 잇거나 혹은 인조를 폐위시키고 즉위했다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개혁개방이 반드시 뒤따랐을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보다 200년 앞서서 말이다.

임진왜란 풍전등화의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것도 아름답다. 그러나 시세를 판단치 못하고 청을 멸시하다 정묘, 병자의 참화를 겪은 조선은 슬프다.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대한민국을 보전하게 해준 미국은 혈맹이다. 그러나 시세를 판단하지 못하고 시진핑의 중국을 멸시하는건 어리석다. 이 또한 역사의 가르침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도 하지 않던가.